데시데리움
[공포회피형 내 이야기] 왜 나는 공포회피형일까? 본문
생각보다 공포회피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내 이야기를 간단하게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이른바 학대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다. 내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다. 밤에 자다가 머리를 발로 차서 얻어맞고, 문을 잠그면 두드리고, 죽여버린다는 말을 종종 들었으며, 한때 입시에 실패했을 때는 별 저주의 소리를 다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입시에 성공했을 때도 한 3개월만 조용했지 또다시 저주의 소리를 들었다.
세상에는 긍정 확언이라는 게 있다. 요새는 그걸 종종 읽곤 하는데, 그때의 나는 가족으로부터 그와 반대인 부정 확언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것도 내가 잠을 자야하는 새벽에. 사이비들이 세뇌를 위해서 자주 하는 방법이 잠과 밥을 제때 주지 않고 사람을 몰아붙이며 세뇌하고 싶은 말을 반복하는 거라고 한다. 아버지는 내게 부정 확언을 자주 내뱉었으며, 어머니는 내 감정을 인정해 주지 않고 내가 문제아라고 말했다. 나에게 집은 수용소였으며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집 밖은 나에게 편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밖에서 하나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침이 싫었다. 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든 간에 학교에 가는 나는 이른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얼굴을 해야만 했으니까. 친구도, 선생님에게도, 경찰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마 수치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만이 동떨어진 섬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편하게 내 감정과 상황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항상 살해당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문을 발로 차서 부서지면 내가 살해당할까봐, 전 집주인이 반쯤 부숴 놓은 문 틈에 압정을 설치하기도 했고, 나만의 작은 휴대용 호신도구를 베개 아래에 숨기고는, 밖의 주정과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하곤 했다. 살해당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 것이 아마 8년 정도였던 것 같다. 잠을 자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머리를 차서 깨우고, 진심으로 죽여버릴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니까.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도대체 누가 이런 공포에 공감하겠는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데! 나는 내가 이단아고 섬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차츰 곯아갔다.
좋은 학교에 합격해서 좋은 직장에 가서 돈을 벌어 이 집을 떠나는 것, 아버지가 말하는 것처럼 인생 패배자가 되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 다른 사람이나, 물건이나, 세상의 좋은 것들에 관심을 가질 여유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대신 책과 환상 속으로 도피했다. 책 안은 나만의 안전한 세계였다.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모험과 우정은 나를 들뜨게 했다. 극한을 이겨내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저런 상황에서도 열심히 하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 줄 사람, 나를 이해해 줄 사랑이 어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책을 샅샅이 뒤져 삶을 긍정하고 철학적으로 나를 무장할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현실과 환상의 간극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내 친구들은 그런 나를 많이 견뎌 주었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런 나를 어느 정도는 견뎌 주었다. 하지만 로맨스의 초반 부분에서 나는 심각하게 도망치곤 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아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락이 귀찮았고, 사람을 알아가는 게 귀찮았고, 관계 초반의 단맛을 조금 보다가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나에게 상처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차단했고, 거절했다. 사실 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확신을 한 적 없다. 왜냐하면 내 역기능적인 가정과 나의 비이성적인 사고를 알게 되면 그 사람들은 당연히 도망갈 테니까. 어차피 떠날 사람들인데 내가 조금 일찍 떠난다고 해서 뭐가 다르지? 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의도를 단정짓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를 이해받고 싶었다. 어딘가는 나를 온전히 받아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가정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감정을, 내 생각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다. 해서 뭘 하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치부와 약점이 들켜서 사람들이 그 부분만 창으로 찌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마냥 벌벌 떤다. 겉으로 보기엔 나는 즐거움을 찾아 다니는 쾌락주의자다. 즐겁고 행복한 것만 사람들에게 말하고 낙천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마음 속의 아우성은 항상 긍정적인 생각만 하게 두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것들, 그리고 내 슬픔들. 나는 그것들을 시체를 몰래 묻듯이 마음 한켠에 묻어둔다. 누군가에게 말해서 공감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이해하고 같이 슬퍼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내가 죽는다고 해도 주위 사람들이 슬퍼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정말 나에게 드는 원초적인 생각만 말하자면 오히려 사람들은 내가 죽은 것이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일상에 가십거리가 하나 늘어난 셈이니까.
내 장례식은 분명 따분할 것이다. 약식에다, 사람도 별로 오지 않지 않을까. 울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얼마나 가까이 지냈든 간에 일상 생활에 돌 하나 던져진 것처럼 작은 파문이 일 뿐 내 주위 사람들은 분명 자기 인생을 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있든 없든 그렇게까지 차이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적어도 나의 감각 안에서는 그렇다.
나는 반응형 사람이다. 내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대하는 것도 없다. 떠나면 떠날 사람인 거고. 버려질 거라는 유기 공포도 별로 없다. 하지만 실상은 나는 언제나 버려질 것을 대비하는 것처럼 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열심히 사회적 반응을 배웠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고, 말의 맥락을 추측해서 그 상황에 적합한 대답과 화제를 꺼낸다. 예전에 학교 심리상담을 신청해서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상담사 선생님이 적합한 반응을 꺼내는 것에 대한 내 스트레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정상적으로 굴고 싶었을 뿐인데, 정상적으로 굴고 싶어하는 욕구조차도 정상인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겉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꺼내지 않고 서운한 것도 없고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반응해 주는, 맞춤형 반응 로봇 같은 나는 수요가 있는 편이다. 관심이 없어서 누군가의 험담을 하지도 않고 열심히 사는 이야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이야기, 미래에 대한 희망찬 청사진과 무조건적인 지지와 위로. 그것이 내가 사람들에게 주는 가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나를 찾는다. 나라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찾을 것 같다. 자신이 원하는 말만 할 수 있으니까.
내가 그렇게 좋은 대화상대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맞춤형 반응과 배려에 스트레스를 동시에 받기 때문에 연락이 잘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다. 연락하는 행위는 나에게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스트레스 유발 요소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내가 하는 배려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준에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그들이 원하는 관심을 하나하나 주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버겁다. 나에게 매일 하는 일상 연락은 관심 없는 신문기사를 매일 아침마다 억지로 읽고 요약해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물론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매일 저걸 해야 한다면, 더구나 읽어 달라는 신문이 한두 개가 아니라면, 더 나아가 내가 공을 들여 해석해야 하는 외국어로 적힌 신문이라면. 누구나 힘들고 지치지 않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 준다. 내가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다정한 사람이라는 말은 별로 못 들어봤다. 통찰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다정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파악하더라. 나는 그 좋아함을 받아 먹으면서 이 관계가 안전할 만한 거리를 항상 찾는다. 일단 친밀해지는 접촉 자체가 나에게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나에게 계속 편안하고 안전할지가 초유의 관심사다. 사실 그렇게 관심도 없다. 내가 정말 편한 관계는 평소에 나를 안 건드리고 내가 원할 때 잠깐 놀아주는 관계다. 문장만 봐도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너무 친밀해지면 나는 그들이 나를 언젠가 찔러 죽일 것만 같다. 반대로 나를 거절하고 떠나도 나는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관계에 얽매여서 질질 끌려다닌다.
반응, 반응, 반응. 아, 일상의 가십 제발 그만 듣고 싶은데. 모든 정보값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누군가가 내가 '거절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다. 사람을 대놓고 거절하면 그 거절에 친밀해지는 게 무서운 내 심리가 탈탈 얽혀 나와서 내 가정사와 은밀하고 부정적인 생각까지 모두 들킬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나에게 이렇게 접근해 주겠는가? 싶은 것도 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일단 음식이 보이면 입에 넣고 보는 것처럼. 나는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쉽게 뿌리치거나 거절하지 못한다.
그렇게 친밀함이 무서우면 그냥 혼자 살면 될 텐데. 언젠가 나도 이해받을 수 있지 않을까? 어디선가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가정이 나를 미치광이로 만드는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다. 좋은 관계, 나를 받아주는 친구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하지만 자주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나는 받아들여진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느껴도 곧잘 튕겨져 나온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한 네 명 정도는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준다. 기적같은 일이다. 나는 나를 견뎌주고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트러블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내 의견을 관철시키기보다 타협한다. 별로 건강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진정한 관계가 없다고 느끼는 걸까? 진정한 관계 문제가 아니라, 왜 계속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가. 이건 외로움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다. 마치 지구를 밖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나만이 어디에도 수용되지 않고 떨어져 나온 느낌. 어쩌면 나는 나를 충분히 이해받고 있는데도, 내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통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역기능적 사고관에 나만 갇혀 있고, 그 유리 수조에 물이 차오르는데 나는 내가 스스로 물을 차오르게 하는지도 모르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해와 배려의 기준은 항상 어렵다. 나도 노력하고는 있는데 최근에는 많이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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