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생각

전시된 아픔은 과연 약점인가?

desiderium 2022. 10. 23. 05:25

오프라 윈프리가 인터뷰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장면이고, 수많은 자기계발서에도 인용된다. 그녀가 그녀의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것에는 용기있는 아픔의 고백과 인정이 있었다고. 사실 나는 오프라 윈프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의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녀의 아픔과 취약성은 누군가에게 약점이 될 수 있을까? 만천하에 밝혀진 비밀이 비밀이 아니듯이, 대중 앞에 공개된 아픔으로는 아무런 협박도, 비난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음침하고 타인을 자신 아래로 보는 것으로 우월감을 채우려는 족속들은 입을 싸게 놀릴지도 모르겠다만, 그런 천박한 족속이 아닌 교양있고 예의바른 현대 사회의 시민이라면 타인의 상처를 찌르는 행위가 오히려 자신의 저열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타인의 어떤 행색이나 행태, 모양새, 습관이나 성질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행위는 올바름이 아니라 해도 좋을 듯하다. 그 어떤 속성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 어떠한 것도 약점이 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금 더 떳떳하게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회에서 규정되는 기준에 맞춰서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온전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어떤 속성이 과연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느껴야 할 만한 것'인지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강요되고 있는 의무와 압박에 대항하여 자신의 뿌리를 공고히 하는 것은 홀로서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타인의 평가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가 싶다. 그럴 때는 판단의 눈을 되돌려주라. 판단하는 그들의 사진을 눈으로 찍어 얼굴 앞에 갖다대 주어라. 그렇게 되면 형세는 뒤바뀐다. 판단하는 쪽이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피할 수 없는 온전한 수치심이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자신이 정한 가치, 자신이 정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그건 부끄러워해도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도시에 산다고 해도 황야를 걷는 것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모래폭풍은 언젠가 멎고, 선인장의 비웃음이 잦아들 때쯤 우리만의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신은 신발 하나가 전부인 것처럼 한 발짝씩 나아가자.